(매년말 이런 글을 써둔것 같은데 다 어디로 도망갔는지... 기록을 위해 2004년 글을 옮겨 놓습니다)
올해는 재미있는 책들을 참 많이 봤다. 12월 한달은 별다른 책이 안나와도 용서가 될것 같다. '오렌지 다섯조각'을 보고 솔깃한 내 마음을 꿰뚫어 보기라도 한듯 인터넷엔 조안 해리스의 '초콜렛' 전문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 좋은 세상이다.... 스캔해서 교정까지 꼼꼼이 본 그 사람에게 감사의 뜻을 전한다. 독서를 마치며 올해 나를 기쁘게 만들어준 소설들의 촌평/감상을 짤막히 정리해 보기로 했다.
초콜렛 - 조안 해리스
방금 다 읽은터라 감상이 생생하다. '오렌지 다섯 조각'의 수준을 가볍게 넘어서는 정말 멋진 소설이다. 독서 내내 진한 핫초콜렛의 향이 방안을 휘감는것 같았다. 특히 소설의 대단원에서 벌어지는 아르망드 할머니의 생일파티와 아이러니컬하게 해소되는 갈등의 장면에서 흐드러지게 묘사되는 맛과 향의 한바탕 잔치란!
올해 읽었던 다빈치 코드의 영향일까, 주인공 비안느의 모습에서 나는 다빈치 코드를 읽고 어렴풋이 동경하게 되었던 여성성, 크리스트교에 의해 억압받기전 이교와 잡종의 문화, 사고, 전례의식을 자유로이 지닌채 생생한 에너지로 가득했던 삶을 살아간 여성의 살아있는 예를 본것 같았다. 마법의 양탄자 타기, 룬 매직, 집시의 노래, 알리바바의 이야기, 성모의 재림, 천체 여행, 포도주 찌꺼기점, 부처의 설법, 모르도르로 향하는 프로도의 여행, 도로시와 토토, 부활절의 토끼, 벽장속의 괴물, 타로 카드점... 오랫동안 많은 곳을 떠돌아 다녔던 비안느를 매혹시켰던 것들이다. 랑스끄네 마을의 신부 레이노가 비안느를 두려워했던 것은 바로 크리스트교가 적대시했던 여성의 속성 가운데 하나인 '마녀'의 이미지를 비안느가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시각으로 보면 이 소설은 한 여인의 색다른 모험담일 뿐만 아니라, 구태한 기독신앙과, 더 인간의 모습에 가까운 이단간의 전면전을 다룬 소설이다!
각색한 영화에는 비안느 역을 줄리에뜨 비노슈가 맡았다는데 순하고 가냘픈 인상의 비노슈가 어떻게 그 역을 소화했을지 궁금해진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 박민규
작년 매우 편협한 독서생활로 인해 많이 뒤로 미루어놓았던 소설들 가운데, 안보고 지나쳤던 시간이 후회스러울 정도로 가장 읽는 것이 즐거웠던 소설이다. 대체 보다가 이렇게 많이 웃은 소설이 또 있을까 싶다. 가벼운 희극의 모양을 띠면서 시작하는 작가의 재담은 이윽고 양적으로 질적으로 폭발한다. 슈퍼스타즈의 연전연패로 인해 처절함으로까지 치닫는 가운데에도 더욱 기세좋게 희화화의 극단으로 내몰리는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마치 난처한 지경에 빠진 희극속의 채플린을 보듯 나는 웃고 또 웃었다.
돌이켜보면 나도 주인공처럼 들뜬 가슴으로 원년 프로야구의 개막을 기다렸던 야구소년이었고, 응원하는 팀의 일승 일패에 그날 밥맛과 기운이 왔다갔다 했던 철부지 야구팬(리틀 오비베어즈 회원이었다)이었고, 나이를 먹으며 서서히 야구를 잊어간 성인이었고, 구조조정의 거대한 경제적 살육의 현장 한가운데 서있었던 힘없는 한국인이었다. 그러나 슈퍼스타즈의 야구를 통해 느린 삶을 선택하는, 프로의 각박한 현실에서 놓여나는 지혜를 터득한 주인공과 달리, 나는 여전히 시도때도 없이 나를 들볶는 현실과 밀고 당기며 아귀다툼을 벌이고 있다. 소설을 읽고 나서 '나도 다 때려치고 싶다'는 걷잡을 수 없는 충동에 몸을 떨었다. 내게도 그런 순간이 올까. 다 털어버리고서 삼박사일 잠을 자고 일어나면 옛 친구가 통닭을 사들고 찾아와 다른 삶을 살아보자고 속삭이는 마법이 풀린 세계를 꿈꾼다.
이 소설에 문학상을 안겨줄줄 안 심사위원들의 결단(?)에 경의를 표하고 싶은 심정이다. 나중에 들은 것이지만 소설의 모티브와 일부 문장이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고 한다. 작가의 의도와 처지를 이해하고 넘어가고 싶다.
나의 아름다운 정원 - 심윤경
난 서울이 고향인 사람이 부럽다. 정확히 말하면 고향이라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이 부럽다. 철들무렵부터 대규모 아파트 단지들을 전전한 나는 다방구와 얼음땡을 하며 놀던 아파트앞 놀이터와 주차장을 겸한 아스팔트 공터에 고향의 추억을 힘겹게 얹어 놓고 산다. 그 어색한 고향의 풍경은 복잡한 획수의 한자어이면서도 가슴 뭉클한 어감과 온기를 지닌 이 힘있는 단어를 삭막한 코올타르와 우중충한 모래 빛으로 바래게 만든다.
지금 내가 사는 곳도 국민학교를 다녔을때 학교에서 집으로 이어지는 길의 모양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지만 난 오히려 몇년에 한번 내려가 보는 할아버지의 고향 안동 촌구석이 더 내 고향이었으면, 그런 생각을 한다. 고종석씨가 소설에서 이따금 되살리는 마포, 심윤경씨가 이 소설에서 아름답게 그려낸 인왕산 자락의 산동네가 내 고향이었다면 비록 개발, 재단장, 구역 개편 등의 근대화에 밀려 그 온전한 모습을 잃었다 해도 서울이 더 포근하게 느껴졌을것 같다. 어린이의 눈으로 바라본 세상의 이야기가 아무리 고달프다 해도 고향의 온기를 머금고 있음으로 해서 아름답게 그려지는 것이 아닐까.
70년대말 격동의 시기를 온몸으로 겪는 어른들을 초롱초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주인공의 마음은 마치 어린 횃불처럼 순수해서, 그에 비쳐 나오는 별난 할머니와 요리 잘하는 어머니, 가장의 부담에 힘겨운 아버지, 짝사랑하는 선생님과 존경스런 옆집 삼촌의 모습에 나는 시도때도 없이 웃음을 터뜨리며 행복해 했다. 할머니의 욕설, 천재 여동생의 재롱, 아랫께 시장의 풍경, 정의파 주미 삼촌의 활약,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소설속에서 반짝거리며 빛난다. 이 소설이 비극으로 마무리되어야 한다는게 너무나 안타까울 뿐이었다. 작가의 실제 경험 중 얼마나 이 소설에 녹아 들어가 있을까. 어릴적 겪은 일들이라면 그의 추억이, 소설속의 허구라면 그의 상상력이 부럽기 한이 없다.
이 책이 한겨레문학상을 받은지 벌써 2년이 지났고, 촉망받는 신예작가였던 심윤경씨는 별다른 징크스도 없이 다시 훌륭한 두번째 소설 '달의 제단'을 내놓았다. 그 책의 감상은 나중에 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세번째 소설을 기다리고 있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 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올해 '날 웃긴 소설 제 3탄'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천연덕스럽게 네루다의 시와 메타포를 읊으며 베아트리스를 꼬시는 마리오 히메네스 곤잘레스의 이야기는 문학이 삶에 해학과 활력, 희망을 안겨 줄수 있다는 증거다. 마리오의 유혹에 넘어가 후끈 달아오른 딸에게 냅다 네루다의 시로 역공을 퍼붓는 로사 부인은 문학이 삶의 주변이 아니라 한가운데 놓일 수 있다는 증거다. 유머는 고난함속에서 오히려 활짝 꽃피어 나는걸까, 나라의 운명이 폭풍속의 배처럼 요동치는 현실을 보면 고달프기 이를데 없을 칠레 작은 섬마을 사람들은 네루다의 시와 사랑과 희망을 잃지 않고 끊임없는 유머를 자아내며 밝은 내일을 머릿속에 그린다.
소설을 덮고 나서 미루어 두었던 영화를 보았다. 아마 먼저 보았으면 나름대로 감명 깊었을 이 영화는 소설의 눈부신 활기에 사로잡힌 내게, 미스캐스팅과 소설의 재치를 제대로 살리지 못하는 대사로 인해 그만 김빠진 탄산수같았다. 주인공 역은 약간 덜 떨어졌으면서도 젊은 혈기를 주체못하고 시를 사랑하는 마리오의 인상과는 거리가 멀었고(실제로 몸이 아팠다는 얘기를 들었다), 여주인공도 마찬가지로 덜 떨어졌으면서도 젊은 혈기를 주체못한채 사고를 치는 베아트리스와는 달리 그저 요염한 라티나일 뿐이었다. 원래 영화가 원작을 능가하기는 어려운 법이다.
스카르메타가 이슬라 네그라의 성당 신부와 읍장 이야기를 소설로 썼다면 아마도 과레스끼를 능가하는 멋진 해학과 인간미로 가득한 작품이 나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봤다.
파이 이야기 - 얀 마텔
문학상 수상작은 예외도 있지만 보통 하품을 참으며 읽어야 하는게 관례라고 해도 무방할, 문학적 성취만 돋보이는 소설이 대부분이었는데, 부커상은 앳우드의 '눈먼 암살자'때부터 심사 기준이 바뀌었는지 이상하게 재미있는 것들에게 상을 주기 시작했다. 파이 이야기는 그런 변화(정말로 그런 변화가 있었던 것이라면)의 혜택을 입은 보기 드문 베스트셀러이자 수상의 복도 누린 걸작이다. 나는 문학적 성취쪽에는 별로 관심이 없으므로 마치 노인과 바다를 연상케 한다는 어느 비평가의 말로 '문학적 성취'의 정도를 대충 가늠하기로 했다.
소설을 읽기 전에는 호랑이와 여행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과연 어떻게 장편의 분량을 채웠을까 의아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긴장감과 재미를 유지하며 인도에서 캐나다로 향하는 기나긴 여정을 흥미진진하게 그렸다. 소재의 특이함이 돋보이는 소설이라는 점 이외에도, 주인공이 여행이 끝난뒤 털어놓는 반전에 가까운 고백으로 인해 이 호랑이와의 여행을 일종의 은유로 받아 들이는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독자에게 남겨놓은 해석의 여지가 독후감을 다양하고 풍부하게 만든다.
다빈치코드 - 댄 브라운
놀라운 페이지 터너로 결말이 궁금해 다음날 출근할 걱정도 잊은채 몰두하여 보았다. 독서중 호기심을 누르지 못해 인터넷을 뒤져 다빈치의 그림을 다시 들여다 보며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은 나뿐이 아닐 것이다. 크리스채니티에 그닥 호감을 지니지 못하는 나는 소설이 통렬히 공격하는 바티칸과 기독교의 위선의 장면이 너무나 마음에 들어 읽다 벌떡 일어나 만세를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다루고 있는 소재와 관련된 많은 독서욕을 불러 일으키는 좋은 소설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지명과 인명은 모두 허구이며 실제와의 유사성이 있다해도 우연의 일치다' 하는 문구를 서두에 적어놓은 소설은 많이 보았으나 '이 소설에 나오는 단체와 사건은 모두 사실에 근거한 것이다' 류의 뻔뻔하고 선정적인 말을 적어 놓은 소설은 처음 봤다 : )
한편으로 다빈치 코드는 베스트셀러가 지니는 사회적 영향력과 책임이 어떠하여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 예라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메가톤급 베스트셀러였던 마이클 크라이튼의 '쥬라기 공원'과 그 점에서 대비되는 면이 있다. 이 두 소설은, 대중문학이 전세계적으로 수천만명이 읽는 베스트셀러가 되면 재미와 소설적 완성도를 떠나 전언이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크라이튼은 소설적 재미와 더불어 고도로 발달한 유전공학과 컴퓨터 사이언스가 가져올 수 있는 부정적인 미래의 모습을 탁월하게 그려내서 과학만능주의에 젖은 이들에게 경종을 울렸다. 댄 브라운은 반면에 허구와 사실의 구분을 작가 자신이 나서서 모호하게 만들어 버리는 바람에(인터뷰에서도 그는 계속 책의 내용이 모두 사실이라고 주장했다) 종교라는 민감한 주제에 다가서는 사람들을 오도하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았다. 어쩌면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들이 문제라고 할수도 있겠지만...
언젠가 한 노르웨이 밴드가 인터뷰에서, 아름다왔던 북유럽의 고대 전설, 신앙, 문화가 크리스트교의 전파로 인해 말살되어 버렸다며 분노에 찬 목소리를 높이던 것을 읽은 적이 있다. 나중에 그 밴드의 기타리스트는 언행일치를 위해 교회에 불을 지르다가 붙잡혀 결국 감옥에 갔다. 그 사람이 이 책을 읽었다면 거봐 내가 맞아 하며 출소후 다시 방화를 일삼지 않을까 싶다.
속죄 - 이언 매큐언
책을 읽은 후 내 머릿속엔 너무나 많은 생각이 떠올라 독후감을 한마디로 말한다면 '어지러움'이다. 예상치 못한 충격적 반전으로 맺어진 결말이, 조용히 독서를 마무리할 준비에 여념이 없던 내 머릿속에 온방향으로 파문을 일으키며 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런 책은 감상을 길게 쓰기 어렵다. 그저 어지러울 뿐이다. 심사위원들도 그랬나 보다. 큼직한 상 하나 받을만 하다.
그것은 아마도 '무구한 젊은 시절에 저지른 과오'라는 매력적인 소재에 정면으로 맞부딛치며 독자들에게 힘겨운 윤리적 선택의 순간을 강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제목에서처럼 매큐언은, 과오에 대한 어떤 합당한 변명이 있다 하더라도 결국 어떠한 '속죄'의 모양으로,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라도 그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강변하고 있는 것같다. 매큐언의 단연 최대 걸작이라고 생각한다.
바람의 그림자 -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나는 비극으로 마무리되는 사랑 이야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 사랑이야기가 너무 고통스러운 것은 견디기 힘들다. 예를 들어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을 느지막히 대학생때 보았을때 난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사랑이 아름답다기 보다는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이하게 여겨져 왜 이게 청소년들이 읽는 고전문학선에 들어가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더 어렸을때 읽었으면 정신적 성숙이 좀 더뎠던 내게 감당못할 충격이 되었을 것이 틀림없다.
스페인에서 작년 내내 베스트셀러의 목록에 올라 있었다는 '바람의 그림자' 역시 주인공 젊은 시절의 폭풍같이 휘몰아치는 사랑이야기가 너무 고통스러워 읽으며 '폭풍의 언덕'을 도중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바스티안 발타자르 북스를 연상케 하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화자이자 주인공인 소년이, 우연히 발견한 한 무명 소설가 줄리안 까락스의 소설들에 매료되어 그의 삶에 얽힌 비밀을 추적하다 수십년이 흐른 현재 자신과 신비하게 얽혀있는 인연의 가닥을 발견해 나가는 놀라울 만큼 흥미진진한 소설이다. '바람의 그림자'는 끝내 이루어지지 못한 가슴아픈 러브스토리이지만, 오랜 책들에 대한 경외, 인연과 운명에 대한 깊은 성찰 등이 잘 얽혀 있어 재미가 더하다. 그 덕에 단선으로 흘렀으면 고통스런 기억만 남았을 소설의 인상이 무척 풍요롭다.
나의 피투성이 연인 - 정미경
난 요즘 TV 드라마들이, 귀에 익은 구절이나 영화의 제목을 도용해다 붙여서 친근감과 그에 이은 시청률의 상승을 유도하는 행위에 심한 거부감을 품고 있다(애정의 조건, 귀여운 여인, 폭풍속으로. 네멋대로 해라. 다 뭐하는 짓이냐). 요즘 일부 소설책들 제목에도 그런 이상한 경향이 보여 못마땅하다. 정미경씨의 소설집을 보았을때도 표절에 가까운(소설속에서 경위를 이야기 하고 있으니 무단이라고는 볼수 없겠지만) 제목이 맘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살 생각없이 서점에서 휙휙 넘기며 들추어보던 이 책의 몇몇 구절에 눈길이 끌리더니 이윽고 내가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가슴떨리는 문장을 쓰는 작가가 있다니. 스토리라인을 떠나서 언어의 조탁에 기울이는 정미경씨와 같은 작가들의 노력에 한국어가 더 세련되고 풍성해지는 것이라는 생각을 품게 된다. 내친김에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한 장편 '장밋빗 인생(역시 제목이...)'도 읽어 보았는데, 본 단편집이 더 뛰어나다는 쪽으로 생각이 기운다. 책제목에 대한 모든게 용서된다.
사랑을 선택하는 특별한 기준, 성에 - 김형경
처음 김형경 작가가 쓴 소설 '새들은 제 이름을 부르며 운다'를 재미있게 보았지만, 왠지 난 그 이름을 오랫동안 잊어버리고 지냈다. 그러나 정말 오랜만에 연달아 본 김형경씨의 두 소설에 가슴 깊이 찌르듯이 와닿는 강렬한 독서 체험을 했다.
전체 분량의 약 50% 정도가 두 주인공 가운데 하나인 세진의 정신과 상담을 다루고 있는 파격의 '사랑을...'은, 아직 부담스런 비용과 너그럽지 않은 타인의 눈길에 신경을 쓸수 밖에 없는 정신치료를 간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 실용적인 목적으로도 쓰일 수 있다. 삼십대 후반에 접어드는 독신 여성 세진의 성장 배경과 심리에 공감할 요소를 찾는 것은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역시 올해 우연히 읽은 전 씨네 21 편집장 조선희씨의 소설 '열정과 불안' 역시 후반부의 절반 이상이 주인공의 정신과 상담을 내용으로 하고 있어 올해 난 정말로 직접 상담을 받은 기분이다).
'성에' 역시 놀라운 흡인력으로, 삶에 찾아온 일탈의 순간에 겪는 죽음, 사랑, 질투에 관한 놀라운 체험담을 펼쳐 보이며 나를 사로잡았다. 성에를 읽고 나서 큐브릭 감독의 '아이즈 와이드 셧'이 떠올랐다. 난 그 영화를 보고 나서, 일견 평화롭고 튼튼해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 그들간에 맺어진 관계가 실은 얼마나 위태로우며 또 얼마나 수많은 붕괴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것인가 하는 생각을 했었다. 영화와 소설은 비교할만한 유사성도 대립점도 없지만 어쩐지 나는 다시 한번 '일상에 내재된 불안'이라는 주제를 떠올리지 않을 수없었다.
그 외에도 성에가 무척 맘에 드는 것은 제법 장편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상하로 쪼개지지 않은 한권의 통통하고 예쁜 책으로 출판되었다는 것이다. "쪼개진 책은 안 사본다" 도서 구입 수칙을 아직 지키고 있는 내겐 책이 '내것'이 되어 보관할수 있다는 것 역시 큰 기쁨이다.
별들의 들판 - 공지영
난 공지영씨의 소설이 좋다. 김XX 교수가 '후일담 문학'의 실패를 공공연히 이야기할때도 난 개의치 않는다. 공지영씨를 방현석씨나 정도상씨 등과 비교하는 것부터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소설의 장르가 다르고, 접근하는 방법도 다르기 때문이다.
세기가 바뀌고 추구하는 이념이 더이상 화두가 되지 않는 이 시점에서도 여전히 치유해야할 과거의 상처가 남아있다는 것을 공지영씨는 이 소설에서 내게 일깨워주었다. 그동안 절필하다시피 살았다지만 하필이면 그가 몸 담고 있던 공간이 베를린이었다는 것은 아마도 공지영씨에게 작가로서 지워진 일종의 운명같다.
공지영씨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부모, 자식, 벗과 사랑하는사람과 주고 받는 작은 정으로 힘을 얻으며 살아가는 가냘픈 존재들인데, 어쩌다 이데올로기와 같은 거대한 폭풍을 만나 그렇게 힘들게 살아가야했는지를, 또 어떻게 살아 남으려 발버둥쳤는지를 비관도 낙관도 없이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그대로 그려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아닐까. 새로운 시작은 또 하나의 거대한 담론과 이론이 아닌 사람들의 용서, 화해로 이루어 질수 있다는 것을 그의 소설을 보면서 새삼스럽게 되새기게 된다. 동명의 중편은 더할 나위없는 감동을 남긴다.
그외....
천운영씨의 두 소설집 '바늘'과 '명랑'을 올해 한꺼번에 보았다. 단순히 재미있다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다. 읽는 내내 나는 마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기분이었다. 분위기와 소재는 다르지만 전경린씨의 소설을 읽을때도 이런 느낌이 들었던것 같다. 그래도 다음 소설이 나오면 또 사보고 싶다. 단편이지만 하나하나가 뿜어내는 기가 보통 강한 것이 아니어서 부담스러웠다. 천운영씨가 장편을 쓰면 어떨까 궁금하다.
트레이시 슈발리에의 '미술과 상상의 만남' 두번째 작품 '여인과 일각수'도 제법 좋았지만 첫 소설 '진주 귀걸이 소녀'만은 못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마 대상의 친숙함의 정도가 떨어져서 그런것 아니었을까.
그닥 호감을 못샀던 책들이라면... 엠마 매클러플린의 '내니의 일기'는 '브리짓 존스의 일기'의 매력을 예상하고 독서를 시작했지만 결국 끝내지 못했다. 뭔가 존스의 일기처럼, 신랄한 비틀림을 받쳐줄 따스한 무엇인가가 있어야 할텐데 그렇지 못한것 같았다. 니콜 키드먼의 팬이라 당연히 찾아서 본 영화 '휴먼 스테인'이 그런대로 괜찮았던것 같다가도 어딘가 조금 부족한 느낌을 지울수 없어 아쉬워하다 그게 필립 로스의 몇년전 소설을 영화화한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원작을 읽어 봤는데... 원작 역시 어딘가 조금 부족하다는 느낌이 들어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돌의 집회'는 다빈치코드와 같은 강력 페이지 터너이긴 하지만 엄청나다 싶을 정도로 크게 벌여놓은 소설의 규모에 스토리가 허덕인다는 인상을 지울수 없었다.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는 그만 그 명성때문에 턱없이 높은 높은 기대를 품었다가 말아먹어서 아쉽기 짝이 없다. 보기보다, 하드한 SF의 긴장감을 놓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꽤 된다. 여유로운 마음으로 책장을 넘기지 말았어야 했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이견이 있으시더라도 이해해 주시길.
내년엔 또 어떤 훌륭한 소설들과 마주하게 될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