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onday, June 08, 2009

빌 브라이슨의 책들

최근 번역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영어산책(Made in America)"을 보았다. 400페이지 남짓한 책을, 자형을 키우고 여백을 잔뜩 넣어 무려 670페이지로 불려 놓고, 어떻게든 먼저 나온 저자의 다른 책들 지명도 덕을 보겠다고 제목에 "발칙한"을 억지로 넣고 부제에는 "미국의 거의 모든 역사"를 역시 억지로 구겨넣은 것을 제외하면 무척 훌륭하다.  큰 길을 따라 가면서도 곁곁으로 나 있는 수많은 오솔길들에도 따스한 눈길을 던지는 저자의 장기가 이 책에서도 잘 살아 있다. 수많은 일화들에 끊임없이 한눈을 파는 것을 봐도 그렇고, 쓰는 책의 분야가 여행기, 전기, 언어학, 역사, 잡학사 등등을 일관성없이 오가는 것을 봐도 그렇고, 빌 브라이슨의 MBTI 성향은 아마 ENFP가 아닐까 짐작한다. 뭐 그게 문제되는 것은 아니고 오히려 빌 브라이슨이 쓰면 어떤 것이라 해도 일단 무척 재미가 있으니 좀 더 다양한 분야에 호기심을 품는다면 기쁠것 같다.

2006년에 빌 브라이슨이 회고록을 내놓았을 때 가슴이 철렁했다. 많은 작가들이 글감이 떨어지면 보통 자기 어렸을때 이야기를 책으로 쓰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아니, 이 사람도 혹시 드디어 그런게 아닌가 싶었으나 다행히 별일 없다는 듯 다음 해에 셰익스피어에 대한 색다른 책을 내놓았다. 아마 이 책도 곧 번역되지 않을까 기대해 봐야겠다.

2005년 6월 백수로 빈둥거리던 시절, 빌 브라이슨의 책을 보고서 다른 게시판에 토막글을 쓴 적이 있었다. 여기 옮겨 보면:

 
뚱보 에세이스트 빌 브라이슨이 역시 만만찮은 뚱보 친구와 함께
좌충우돌하며 3,300Km의 애팔래치아 산맥을 종주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쓴“나를 부르는 숲(A Walk in the Woods)”을 얼마나
재미있게 봤는지 모르겠다.

거긴 참 좋기도 하지만 걷다보면 곰이 나온댄다...

빌 브라이슨의 에세이로 처음 본것은 우연히 마주하게된
”The Mother Tongue“이라는, 영어의 여러가지 흥미로운 면들을
살펴본 에세이 모음이었다. 고종석씨의 책과 함께, 나와 같은 아마추어
링귀스트들의 호기심과 지적 욕구를 가득가득 메워주는 책이었다.
최근엔 “거의 모든 것들의 역사”라는 베스트셀러를 쓰기도 했다.

그런데 브라이슨에게 명성을 안겨다 주었고

또 그의 진가가 가장 잘 발휘된 분야는 바로 여행기라고 한다.

지난번 배낭여행때도 그의 에세이를 한권 사서 읽으며

미처 못가본 도시와 지역에 대한 아쉬움을 달랬다.
이게 내가 본 그의 네번째 책이 된다.

상당수의 여행기들이 “몇시에 일어났다. 가이드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어쩌고..“하면서 일지를 그대로 옮겨 쓴듯 한심한 꼴을 하고 있는데
비해 브라이슨의 여행기는 1) 유익하며 2) 웃기다는 두가지 특성으로
요약할수 있다. 심드렁하게 둘러보면 아무것도 아닌듯한 곳에 활기를
불어넣으며(물론 변변찮으면 막 욕을 퍼붓기도 한다), 또 끊임없이
개그맨처럼 자학과 희화화를 거듭해서 푹 하고 웃음을 터뜨리게 만든다.

주말에 형님 가족과 있다가 문득 그 책 이야기가 나왔는데,
귀가 솔깃한지 책을 빌려갔다.

아는 사람은 알겠지만, 나랑 형은 참 여러가지가 다르다.
다년간의 보디빌딩으로 다져진 근육에
소주 네병을 끄떡없이 마시고 아직도 일주일에 두세번은
새벽 3시에 집에 들어와 5시면 일어나 출근하는 강철인간이다.
(내생각엔 점심시간때는 어디 숨어 자는게 틀림없다고 본다)
결혼하기 전에는 주말만 되면 ’우간다‘라는 희한한 이름의
동아리 사람들과 전국의 온갖 산을 올라갔다 내려오곤 했다.
결혼 후론 식구들과 대신 이마트를 오르내리고  있다.

그 책이 오랜만에 그런 형님의 피를 끓게 한 모양이었다.
‘같이 산에 안 가고 싶냐’하고 낮에 느닷없이 전화가 왔다.
난 뭐 그렇게 등산, 하이킹을 좋아하는 편이라고는 할수 없지만
요즘 매일 달리기하면서 체력도 좀 좋아진것 같고, 사실 나도

그 책을 보면서 조지아 주에서 메인주까지, 14개주에 걸쳐 이어지는
거대한 (곰도 나오는) 하이킹 트레일을 종주해보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던 차라,


그렇게까진 못한다 하더라도 지리산에는 갈수 있지 않겠나 싶어
그럽시다요 하고 낼름 맞장구치고,
아까 태어나서 처음으로 등산화란걸 사와서 신어보고 들떠 있다.

그리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형과 등산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인상쓰면 내가 여전히 좀 쫄긴 하지만,
이제는 친구같은 형님과 여행을 한다니, 크하하, 재밌겠다.
산장은 벌써 다 예약으로 꽉찼댄다.

텐트는 힘 좋은 형이 지고 가라고 해야지.


곰 만나면 잡아 오겠다고 했더니 조카들은 아주 좋아하면서, 아빠곰
말고 아기곰을 잡아 오라고 했다. 귀여운 놈들.


  (저 지리산 산행은 다음날 정상 등반을 앞두고 잠을 청한 세석산장에서 그만 호된 감기에 걸리는 바람에 어떻게 올라갔는지 어떻게 내려왔는지 기억도 제대로 안나는 안개속같은 분위기로 마무리되었다.)

 
위에서 쓴 것처럼 브라이슨의 글로 처음 읽은 것은 진지한 내용이라 언론인 출신 재야의 언어학자일 것이라고 짐작하였으나, 호주 배낭여행길에 우연히 집어든 호주 여행기 "Down Under" (미국판 제목은 In a Sunburnt Country)를 보며 정말 많이 웃었다. 멜버른의 유스호스텔 같은 방에 묵던 한 영국 학생이 두고 나간 책을 살짝 집어 보다가 무척 마음에 들어 냅다 사가지고 보면서, 그 뒤로 이어진 기나긴 버스 여행의 지루함을 잊었다. 여행중 보관을 잘 못한 탓에 책이 좀 낡았지만 이곳저곳에 적어둔 감상과 당시 상황등이 남아 있어 이따금 다시 들춰 볼때마다 여행때의 감흥이 되살아 난다. 이 책이 "나를 부르는 숲"보다 좀 더 빌 브라이슨의 개그 실력이 잘 발휘되어 있다고 본다. 아무래도 애팔래치아 산속보다 호주에 좀더 재미있는 것이 많아서 그럴거다. 내가 보기엔 영국 사람들이나 호주 사람들이나 다 그게 그거 같은데 (대충 봐서 그런가)... 책은 예전에 그가 호주로 날아가는 비행기에서 읽었던 놀라운 사실 - 호주의 수상 중 한명이 해변을 거닐다가 갑자기 몰아닥친 파도에 휩쓸려 가서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은 사건을 언급하며 시작한다. 놀라운 이유로 그가 든 것은:
  1. 그래도 일국의 수상인데 어떻게 혼자 그렇게 돌아다니다 '사라질' 수가 있다는 말인가
  2. 어떻게 이런 뉴스가 언론/출판에 종사하는 저자가 모르고 지나칠수 있었단 말인가
그의 조사에 따르면 시드니 올림픽을 앞두고 세계가 들썩거렸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1997년 전체에 걸쳐 뉴욕 타임즈 지상에 호주에 대한 언급은 딱 스무번 나올뿐이었다고 한다 (비교 차원에서 페루에 대한 기사는 120 차례, 알바니아/캄보디아는 150, 한국은 300 차례나 언급되었다). 그나마 그 해는 다행히 많은 편이고 1996년은 아홉번, 1998년엔 여섯번이 전부다. 이런 대단히 지엽적이지만 알고나면 참 기가막힌 일화들이나 사실들을 부지런히 찾아내 책의 내용을 풍부하게 만드는 재주가 돋보인다.

요즘은 무슨 일에 귀가 솔깃하여 관심을 쏟고 있을까 궁금해진다. 브라이슨도 블로깅을 할까?


1 comments:

Bricks in Chennai said...

My cousin recommended this blog and she was totally right keep up the fantastic work!


실크 양탄자 인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