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년전 인기를 끌었던 알렉산드라 마리니나의 소설을 읽은 후 꼬리를 물고 찾아든 생각을 적어 놓았던 것입니다. 정작 책에 대한 내용은 없어서, '서평'이 아니라 말그대로 '독후감'이 되겠네요.
요즘 알렉산드라 마리니나의 소설을 재미있게 보고나니 러시아어에 쓰이는 키릴 문자는 어떤 것인가 궁금한 생각이 들어서 책을 하나 집어 보았는데, 뜻밖에도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물리학 시간을 통해 익힌 그리스어 알파벳하고 겹치는 것이 많다. 오래전에 마로가 러시아어 수업을 듣는다고 이야기하던 것이 기억난다. 내 이름과 친구들 이름을 써보았다. 써놓고 보면 근사하다. 아직 익숙치 않아서 내가 써놓고도 읽을수 없다. 신기하다. 그런데 'j'에 해당하는 장식용 촛대같은 문자하고, 'd'에 해당하는 고장난 우주선같은 문자를 보통 러시아 사람들이 어떻게 간단하게 갈겨쓰는지 궁금하다.
나의 이러한 교만을 경계라도 하는 듯,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이어진다 : "러시아어 알파벳을 배우는 일이 어렵지 않게 느껴진다 하더라도, 러시아어 자체를 배우는 일은 그와 또 다른 문제다. 러시아어는 그 긴 지명과 인명( ex Nepomnyashchiy, Dnepropetrovsk), 긴 단어(upotreblenie - use, dostoprimechatelnosti - sights, zhemonenavistnichestvo - misogyny), 특이한 자음의 연속(vzvod - platoon, tknut'- to poke, vstrecha - meeting)등으로 악명높은 언어다. 또 명사, 대명사, 형용사, 숫자는 여섯가지 격변화(nominitive, genitive, dative, accusative, propositional, instrumental, locative)를 해야 하며 성은 세가지로 나뉘어지면서 각각 서로 다른 격변화형태를 가지고, 복수일때 또 변화하는 형태가 다르다 ... "
배우라는 거야 말라는거야 대체.
이러한 특징은 굳이 러시아어에 국한된 것이 아니고, 알파벳과 구체적 용법 몇가지만을 달리할뿐 슬라브어라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는 특징이라고 한다. 게르만어와 로만어에서 맛볼수 있던 이국적 정취와 호리호리한, 때로는 선굵은 아름다움만을 마음속에 간직한채 선뜻 혀와 머리로 익히려고 했을때, 매몰차게 내 호의적인 접근을 거부하던 동유럽의 언어들. 그 주된 원인은 키릴문자가 주는 이질감이라고 줄곧 여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그렇지도 않았다. 눈에 익은 로만 알파벳으로 쓰여진 폴란드어 역시, 첫음절을 읽기도 전에 혀가 굳어버리는 암담한 경험을 했었다. (przemysl - industry, szescdziesiat - sixty, wszechswiat - universe)
내가 여태까지 들었던 블랙/데스 메틀 가운데 가장 극악무도하고 광폭한 음악을 연주하는 밴드는 마케도니아 출신의 발탁(Baltak)이라는 밴드다. 러시아 연방이었던 국가들외에도 불가리아, 세르비아 등의 동유럽국가는 키릴 문자를 쓴다. 마케도니아도 키릴 문자를 쓴다. 아니 말이 잘못 되었다. 키릴문자를 발명하고 가장 먼저 쓰기 시작한 사람들은 마케도니아인들이기 때문이다. 발탁의 1집은 가난한 밴드들의 음반이 그렇듯 허술하고, 또 키릴 문자로 뒤덮여 있어서 열심히 듣고도 제목도 기억못하고 밴드에 대한 소개도 하나도 알수 없었다. 멤버는 Gorgoroth(톨킨을 읽었나보다)와 Alexander의 2명뿐이고 녹음도 4트랙 스튜디오를 빌려서 한다. (사실 블랙메틀은 기자재가 좋아야 꼭 정상급의 음악이 탄생하는 장르가 아니다).
난다긴다 하는 정상급 스칸디나비안 브루탈 블랙 메틀 밴드들 - Immortal, Marduk, Burzum 등을 모두 때려 눕히고 최고 강자로 떠오르면서 발탁은 돈을 좀 많이 벌었나보다(이 동네에서는 세계적으로 5만장 정도 팔리면 대형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2집의 북클릿은 정말 두툼하고 화려해졌으며 본격적인 세계시장 진출을 의식한 듯 영문으로 쓰여져 있다. 자신들이 알렉산더 대왕의 후손임을 자처하면서 마케도니아의 영광스런 지난날을 신나게 적어놓았다.
거기서 읽은 내용인데, 우리가 흔히 키릴 문자를 발명하였다고 알고 있는 키릴과 메토디우스는 거꾸로 오래전부터 마케도니아인들이 써왔던 마케도니안 알파벳 (우리가 키릴 문자라고 부르는 것의 원형)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아르메니안 알파벳을 대신 쓰도록 결정한 미카엘 황제의 명을 받아 파견된 어용 학자라는 것이다. 사실이라면, 금지령이 풀려서 다시 사용이 자유로와진 마케도니아 문자에 대신 덧붙여진 이름이 키릴 문자라는 것은 아이러니컬하게 느껴진다.
이 북클릿은 발칸반도에 자리를 잡고 자신들의 영토에 뿌리 내린 그리스에 대한 반감과 온갖 악의적인 비난(그리스인들이 인류에 준 선물은 한결같이 사악한것 뿐이랜다. 노예제, 호모섹슈얼리티, 레즈비어니즘, 매춘, 인신 공양등) 으로 가득차 있다. 이 내용을 어디까지 믿어야 하나. 어쨌거나 영화로웠던 과거를 먼 지난날의 이야기로만 끌어 안은채 마케도니아는 지금 인종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그 언어조차 불가리아어의 방언에 불과하다는 경멸어린 문구로 묘사되고 있는 처지의 국가다.
이 이야기를 접하면서 내 머릿속에는, 세계 최초로 금속활자를 발명한 사람이 틀림없이 한국인인것처럼, 키릴문자를 만들어 쓰고 통설과 달리 역으로 그리스 문자의 발명에 영향을 주었다는 마케도니아인들의 주장이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둘의 공통점은 그 진실을 뒷받침할 힘이 없다는 것이고. 서구인들의 머릿속에 구텐베르크라는 사람이름 대신 직지심체요절이라는 단어가 새겨질 날이 과연 올까.... 그런 의문이 생겼다. (2004.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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