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석씨의 글을 읽는다는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 미안한 말이긴 하지만 그가 언젠간 글을 통해 밝힌바 있는, "이루고 싶었던 수많은 꿈들을 하나둘씩 접고 결국 지금의 모습으로 남아야 했다"는 사실이 내겐 얼마나 다행스럽게 여겨지는지 모른다. 나는 학자나 사전 편찬자가 아닌 지금의 고종석씨가 좋기 때문이다. 인물과 사상을 통해 그의 긴 글 "우리는 모두 그리스인이다"를 처음 읽었을때의 감동이 아직 생생하다. 잇달아 사본 "유럽통신", "책읽기책일기", "기자들", "사랑의 말, 말들의 사랑", "제망매"... 프랑스에서 행복하게 살고 있다고 믿고 있던 그가 우리나라에 돌아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마음아파하기도 했다. 천리안의 한 동호회에서 프랑스 배낭여행시 그를 찾아가서 만나기까지 했다는 열성적인 팬 한분을 알게되어 몇차례 주고 받았던 메일과, 그분께 보내려고 워드 프로세서로 쳐넣어 보던, 이충걸씨가 눈부시게 써내려간 고종석씨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한국에 돌아와 신문사에 몸을 담은 후 많은 매체에 써놓은 글들을 미처 찾아 읽을 여력이 없던 마당에, 최근 책의 모습을 하고 동시에 간행된 두권의 글모음 "자유의 무늬" "서얼단상"을 읽는 저녁 시간은 내내 성대하게 차려진 잔치에 초대받아 포식을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고종석씨가 예전처럼 긴 시간을 들여, 긴 호흡으로 쓴 글을 읽을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을것 같다. 파리의 한 구석에서 자유인으로 살았던 시절의 낭만과 여유가 깃든, "유럽통신"에 실렸던 그런 글들을 다시 쓰기는 쉽지 않을것이다. 이제 그의 글은 자주 반복된다. 쓰고 싶은 말이 넘쳐 흘렀을때 쏟아 냈던 명문들의 변주다(하지만 반짝임을 잃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그래서 품게 되는 꿈이 있다. 가능성은 희박하지만, 혹시 내가 돈을 아주 많이 벌어서 쓰고도 남을 만큼의 재산이 생긴다면, 고종석씨에게 드려서 파리에서 여생을 보내게 하는 것이다. 다시 몽파르나스와 생미셸 거리를 거닐면서 자유의 공기를 만끽하는 고종석씨의 눈을 통해 프랑스, 유럽의 소식을 전해 듣고 싶다. 상상만 해도 기분좋은 일이다.
고종석씨와 술자리를 할 기회가 있었는데도 망설이다가 가지 않았다. 소심하게도. 그의 아름다운 글에 비해서 그의 말은 어눌하다고 할 쪽에 가깝다. 활자화된 그의 정신세계와 잘 조화를 이루지 않을 실제의 모습을 가까이서 바라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진돌의 언어민족주의의 방향을 180도로 틀어놓은 자유,보수,우파의 언어론이다. 프롬킨과 이정우, 장영준교수의 언어학 개론서, 몇권의 외국어 교재, 들었다놓았다 결국 무슨 소린지 이해못하고 멋쩍어하고 말았던 소쉬르와 촘스키 등으로 얼버무릴수 있는 언어에 대한 내 관심에 다시 불을 질러놓은 책. 수없이 되풀이해 읽는 시간이 조금도 아깝지 않다.
고종석씨 자신의 말처럼 프랑스에서 "허랑방탕"하게 유랑하며 지내던 시절 문학동네에 기고한 서간문 형식의 글을 단행본으로 낸 것이다. 한국이 답답했기 때문이었을까, 파리에 둥지를 틀고 유럽 이곳저곳에 눈길을 던지며 한국의 지인들에게 투정과 그리움을 담아 보낸 편지들 속에서 고종석씨는 마치 날아오르는 새같다. 내쳐 소설만 읽던 내게 한국어 산문의 아름다움을 한껏 들이마시게 해준 책이다.
미국인이 앰브로즈 비어스의 악마의 사전을 꺼내놓는다면 나는 고종석의 이 책을 꺼내놓겠다. 이외수의 "감성사전"을 꺼내놓을까 하고 잠시 망설일수도 있겠지만, 결국 내 마음은 이 책으로 기울 것이다. 그가 선택한 낱말들이 가림없이 퍼부은 애정으로 두툼하게 살져 있다.
한인철은 세계인들과 사이에 놓인 장벽이 무너진 후의 고종석이다. 프랑스 외무부의 지원으로 파리에서 저널리즘 연수를 받을 때의 일들을 픽션화한 이 소설은 어쩌면 연수 이후 결국 파리로 다시 날아갔던 그가 꿈꾸던 자신의 모습을 설정해놓은 이상이 아니었을지.
인문학적 지식으로 소설을 쓸 수 있는 사람이, 아니 쓴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고종석씨는 자신이 소설가가 될것 같지는 않다고 했지만 이 단편집을 통해 그는 이미 소설가가 되어 있었다. "찬기파랑"에 담은 그의 허구의 사실적 묘사와 위트가 사랑스럽다.
내가 한글과 한국어에 품고 있던 (커다란) 애정과 불만, 의구심, 궁금증이 고종석씨가 담담히 이렇게 한권의 책으로 묶어놓은 양의 작은 부분집합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이 책을 내 복음서처럼 만들고 있다. 그 외에 한글과 한국어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했던 수많은 사실들이 한겨레 신문에 연재되었던 이 토막글속에 보석처럼 담겨 있다. 비국어학 전공자가 한글과 한국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수 있는 소중한 창문이다.
고종석씨의 앞에 차례로 불려나간 한글 자음 모음들이 각자 한아름 선물을 받아들고 흐뭇하게 돌아서 나온다. 조금 힘겹게 읽은 고종석의 책들. 그의 관심사가 내가 소화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뻗어나가 있어서다. 그를 사로잡는 대상인 인문학, 철학, 김현, 푸코, 라캉 등...대체 무슨 말들인지(조금 부끄러움). 들여다 보고 소개하는 책들도 내 좁은 시야를 멀찌감치 비켜 지나간다. 그를 이루고 있는 자양분이 그를 통해 세상의 일부를 내다보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이라는게 그리 예상밖의 사실은 아니지만, 그래도 섭섭한 마음이 고이는 건 어쩔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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