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uesday, January 27, 2009

벽호출판사 - 오늘의 세계문학 전집에 대해

80년대 중반 지학사 오늘의 세계문학으로 간행되었던 이 문학 전집 시리즈는 90년 계열사인 도서출판 벽호의 창립과 함께 표지 장정을 바꾸고 새롭게 태어났다. 그러니 그냥 벽호판 세계문학 전집이라 부르겠다. 87년 한국 출판 기자단 선정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기도 하고, 국제 펜클럽 한국 본부에서 수여하는 펜클럽 번역 문학상도 수상한 바 있다. 좀 애매한 숫자인 34권을 끝으로 중단되었다. 한때 어느 서점의 문고 코너든지 범우사, 혜원출판사 등의 문학 전집과 나란히 꽂혀 있던 이 시리즈는 교보서적의 온라인/오프라인 매장에서 남은 것이 간혹 눈에 뜨일 뿐 출판사의 활동정지와 함께 완전히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물론 벽호 세계문학은 고전의 번역을 시도해 비교적 생명력이 길고 꾸준히 사람들이 찾는 여타 문학 전집과 성격이 다른, 20세기 중후반의 전세계 언어권의 문제작들을 집중 선정한 대단히 훌륭한 기획이었다고 본다. 라고 말하면 내가 이 문학 전집을 다 읽어 보았다든지 작품과 작가를 다 꿰뚫고 있는 것으로 여길 분이 계실텐데, 말도 안되는 소리고, 이런 저런 경로로 책이 번역된게 있나 찾아 보다가 벽호 전집으로 몇차례 회귀한 일이 있어서 작품과 작가 선정이 꽤 충실하지 않았나 여기게 된 것이다.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잘 알수 없다(원문과 비교할 방법이 있어야지) - 그러나 문장의 어색함이나 내가 대충 짐작할수 있는 영불서어권의 고유명사들이 거의 정확한 것으로 보아 좋은 번역이라고 우선 옹호하고 싶다. 번역상까지 받았다는데.

 

벽호 시리즈의 특징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꼽을 수 있다.

 

1. 조잡하고 촌티나는 장정

 

90년대면 전자출판의 도래와 함께 분명히 책 디자인도 비약적인 변모를 하였을 시기인데 시대의 흐름을 냉정히 무시한채 헌책인지 새책인지 (별 차이가 없다) 구분이 안가는 누리끼리하고 칙칙한 색에 자와 먹을 대고 도안한 듯한 출판사 마크, 게다가 난데없이 새빨간 색으로 매겨넣은 책등머리로 가판대에서 볼수 있는 24/365 할인용 사주팔자, 성인 서적들과 디자인의 맥을 같이 하고 있다. 디자인한 분께는 정말 죄송하다. 그러나 도저히 성의있는 디자인이라고 볼 수 없다. 빛이 바랜 파스퇴르 우유 광고같다. 단 한가지 좋은 점이라면 앞의 말대로 헌책방에서 발견해도 세월과 사람의 흔적이 좀처럼 눈에 뜨이지 않는 새 책과 다름없는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진보적이고 선견지명을 갖추었다고 볼수도 있겠다. 아주 좋게 보면.

 

2. 다양한 판형

 

보통 전집의 책들이 원작의 분량에 따라 두께만 달라지는 관행을 '인습'으로 간주하고 과감히 타파하였다. 높이도 다르고 너비도 다르다. 대체로 두종류에서 세종류의 서로 다른 크기의 창조적인 판형을 가지고 있는 듯 하다. 작품의 선정으로 보아 분량의 차이가 제법 있을 수 밖에 없는데 두권으로 나누어 진 것이 없는 것을 보면 이 변칙적 판형은 혹시나 책의 '두께'를 일정하게 해보자는, 역시 대단히 진보적인 아이디어를 실체화하기 위한 시도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3. 다양한 지질 혼합 사용

 

책배나 위아래를 보자면 왜 그랬을까 싶게 다양한 색조의 용지를 섞어서 제본한 것들이 눈에 띈다. 찍다가 용지가 모자라서 창고에 처박아 뒀던 비상용지를 허겁지겁 가져와 제본기에 끼워넣은게 아닌가 싶다. 경계에서 책등이 꺾어질 것같은 두려움을 불러 일으킨다. 그러나 다행히 우려와 다르게 제본은 튼튼하다.

 

4. 오타

 

이걸 특징이라고 하면 좀 과장이겠지만... 그래도 책의 원제목은 좀 신경써서 철자를 교정해야 하지 않았나 싶다. 아르떼미오의 최후에서 Murete는 아마 Muerte가 맞을것이고, 녹색의 집의 Varde는 Verde의 오자다. 오자도 일관성 있게 쓰면 모르고 넘어가게 되는데 나중엔 또 맞게 고쳐 써서 탄로가 난다. 밤새 교정 보다가 지쳐 쓰러진 박봉의 출판사 직원 혹은 대학원생 조교의 애절한 실수라고 보고 넘어가자.

 

위처럼 말하면 대단히 무성의한 출판물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개인적인 취향일런지 모르겠으나 난 한국화의 전통미를 계승하는 놀라운 비율의 여백과, 라지 프린트 수준의 활자로 무장하고, 500페이지도 안되는 소설을 한페이지에 겨우 스무줄 가량 집어넣어 두권 세권으로 쪼개놓은 기가 차는 문학전집이 활개치는 요즘, 딱 펼쳤을 때 독서욕을 자극하며 한판 겨뤄 보자는 듯 다가오는, 고색창연한 옛 문학전집의 마지막 자취를 간직한 이 벽호판에 가슴 뛰는 매력을 느낀다. 활판인쇄였으면 더 멋들어지지 않았을까 한다.

 

내가 읽어본 책은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문학 전집을 독파하는 분들 너무 존경합니다). 애서가들 중에는 쿤데라의 농담을 제일 처음으로 번역한 벽호판으로 읽다가 그럼 다른 책들은 뭘까 궁금해서 하나둘씩 찾아 보게 되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을 보았다. 나는 어쩌다 상당히 많이 보게된 마가렛 앳우드(운이 좋아서 이 할머니와 악수도 하고 책에 사인도 받았다. 노벨상을 받게 되면 비싸게 팔아먹으려고 한다. 근데 진지하게 나가야 할 막판인 요즘 어째 SF로 새고 있어서 상 받기는 물건너 간게 아닌가 한다. 여사의 소설 가운데 도둑 신부와 엘리어스 그레이스를 재미있게 볼 만한 것으로 추천한다)의 소설중 데뷰작 떠오르는 집을 읽어 보고 싶어서 뒤늦게 찾았는데 어느새 책들은 모두 사라져 버린 뒤라 결국 못 보았다.

 

잘 나가다가 그만 추리물과 '아저씨가 꼬마 여자 괴롭히는' 소설을 숱하게 써서 앳우드 여사와 더불어 노벨상과 연을 매정히 스스로 끊고 있는 조이스 캐롤 오츠 여사를 나는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데(이유는 나중에 기회가 있으면) 메인스트림에 올라 있는 소설 가운에 한글 번역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이 벽호판의 '나와 더불어 그대 뜻대로' 뿐이었다. 그리고 그 외에 바르가스 요사의 '녹색의 집', 레싱의 '황금나침반'을 읽다가 포기하고 대신 본 '풀잎은 노래한다', 핀천의 '제49호 품목의 경매' 등을 벽호 전집에서 추천할만한 책으로 꼽고 싶다. 뭐 다 재미있어서 밤새며 본 것은 아니었지만, 평론가나 문학 교수들이 떠받드는 책들 가운데 그나마 흥미를 잃지 않고 끝까지 볼 수 있는 작품들을 골라 담고 있는 전집이면 훌륭하지 않은가 한다. 아마 다른 책들은 또 다른 분들이 제대로 평가해 주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러면 더 밝아진 눈을 하고 헌책방을 돌 수 있을 것 같다. (200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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